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까지 역사적 흐름에 내맡겨진 재일조선인 4대의 연대기를 그린 대서사입니다. 2017년 미국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작품입니다. 같은 해 뉴욕타임스(NYT), BBC 등에서 '올해의 책 10'으로 선정했고 전미도서상 픽션 부문의 최종 후보작에도 올랐습니다. 현재까지 전 세계 33개국에 번역 수출됐으며 BBC, 아마존 등 75개 이상의 주요 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뽑혔습니다.
올해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도서에 15위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파친코'에 대해 "'역사는 우리에게 실패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전쟁과 식민지, 개인적 갈등을 4대에 걸쳐 겪은 한 한국 가족의 풍요롭고도 소용돌이치는 연대기인 이민진의 소설은 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어 "교활한 조폭과 장애를 가진 어부, 금지된 사랑과 비밀스러운 상실이 등장하고 승리가 거의 보장되지 않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생 도박꾼인 주인공들에게 재정적 생명줄을 제공하는 핀볼 같은 게임인 파친코도 등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소설 '파친코' 개요와 이민진 작가 이야기
양진과 그의 딸 선자, 선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가 낳은 아들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민족 수난사를 투영합니다. 차별과 멸시를 받아온 이들은 선한 의지와 자존감을 지키며 강인하게 생존합니다. 선자는 마늘 냄새가 난다는 모욕 속에서도 김치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모자수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자이니치들이 유일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파친코 사업을 합니다.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강제로 혹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일본으로 넘어간 이들은 '조센징' '자이니치' 등으로 불리며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엄청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이민진은 객관적인 외부의 시선으로 이들의 삶을 조명했습니다. 그는 이들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좀더 절제되고 세련된 언어와 시선으로 일본 사회의 부조리함을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또 이들이 헤쳐온 역사의 질곡과 슬픔, 절망에 맞서 인간의 선한 의지와 자존감을 지키며 고난 속을 뚜벅뚜벅 걸어온 강인한 삶의 자세를 비추는 데 중점을 둡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로 빠르고 힘있게 서사를 끌고 가면서도 딱 필요한 만큼의 심리 묘사로 감정의 파고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라고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이민진이 이 방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한 건 작품을 내놓기 30년 전입니다. 일곱 살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한 초청강연에서 일본에 다녀온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재일조선인들의 삶에 관해 듣게 됩니다. 특히 조선계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한 중학생 남자아이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로스쿨을 다니고 변호사로 일하다 건강 문제로 그만둔 뒤 재일조선인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펴냈습니다. 그러다 2007년 도쿄로 발령난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4년간 살게 되면서 재일조선인 수십 명과 인터뷰를 하고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해 10년 가까이 고치고 또 고쳐가며 대서사를 완성했습니다.
'파친코' 줄거리 요약
1권 : 일제강점기 조선, 부산 끄트머리에 자리한 작고 아름다운 섬 영도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빼앗긴 나라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고된 삶이지만 양진과 훈이는 하숙집을 운영하며 하나뿐인 딸 선자를 애지중지 기릅니다. 훈이가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후에도 양진은 선자와 함께 하숙집을 꿋꿋이 꾸려나갑니다. 열여섯 살이 된 선자는 제주 출신의 조선인으로 일본에서 일하는 생선 중개상 고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오사카에 아내와 딸들을 둔 유부남임을 뒤늦게 알게 되고 이별을 합니다. 개신교 목사 백이삭은 오사카로 가는 여행 도중 선자네 하숙집에 머물고, 선자를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겨 청혼을 합니다. 선자는 이삭을 따라 오사카로 향하지만, 그곳에는 선자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권 :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선자네 가족은 노아·모자수 두 아이를 기르며 꿋꿋이 버텨나갑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합니다. 노아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떳떳하게 살아가기를 원해 극적으로 등록금을 마련한 뒤 와세다대학교에 진학합니다. 모자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파친코 사장 밑에서 일을 배우며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일본을 떠나 고향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꿈꾸는 와중에 노아는 선자가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을 알게 됩니다.
2022년 인플루엔셜에서 내놓은 개정판 '파친코'
출판사 문학사상은 2017년 이민진과 5년 계약을 맺고 이듬해 3월 '파친코' 1·2권을 출간했습니다. 2019년 애플TV+ 드라마로 제작이 결정되고 2022년 드라마가 공개되면서 원작 소설이 다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에 판권 계약을 따내기 위해 국내 10여 개 출판사가 경쟁해 기존 출판사 문학사상 대신 인플루엔셜이 ‘파친코’ 판권을 계약했습니다.
인플루엔셜은 오역(誤譯)을 수정하고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살려 2022년 7월과 8월 각각 ‘파친코’ 1권과 2권을 내놓았습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번역가 신승미 씨가 새 번역을 맡았습니다. 개정판 분량은 초판과 비슷한 380쪽 수준입니다. 기존 책 중간중간에 나오는 빈 페이지는 없애고, 챕터별 제목도 삭제했습니다. 출판사 측은 작가로부터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별도로 받아 개정판에 추가했습니다.
개정판은 1~3부로 구성된 영어 버전의 큰 틀을 유지하고 챕터별 한국어 제목은 없앴습니다. 이민진은 소설의 첫 문장을 비롯해 “작가의 의도가 최대한 많이 반영됐다”고 흡족해했습니다. 소설 중간에 사용한 인용구가 그대로 들어간 것도 만족스럽다고 짚었습니다.
이민진은 2022년 8월 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개정판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파친코의 독자들이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만 봐도 5천 년 넘는 역사를 가진 나라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며 “파친코가 위험한 책이란 것은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알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설이 주류 사회에서도 인기를 끈 비결에 대해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 유럽과 미국 독자들로부터 호감을 얻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인종차별, 계급, 문화적 제국주의, 식민지 등을 다루는데 19세기 영문학에서 많이 쓰인 스타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파친코 출간 초기엔 독자의 99%가 아시아계와 관련 없는 백인과 흑인이었다”며 “한국 독자들이 내 책을 안 읽으니까 ‘뭔가 잘못했나’ 걱정하기도 했는데 요즘엔 한국 독자들이 북 토크에 와주고 편지도 써준다”고 전했습니다.